NOTE/O



그런 날이었다. 날씨가 온도로 투정을 부리는 날. 차가운 겨울 지나 봄의 문턱에 걸쳐 있는, 그 사이 만개한 개망초꽃 이 학교 앞 들판에 만개한. 교실 맨 첫 분단 끝 창가 자리에 앉은 세진이 창문을 열자마자 교실로 봄 내음이 쏟아져 들어오는. 여전히 코끝은 시렵고, 창가에 내려앉은 공기는 차가웠지만 내리쬐는 햇빛은 따뜻한 그런 모순적인 날이었다. 파릇하게 피어오른 봄 내음에 곧 벚꽃이 피어나겠다며 기대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그 소리들을 배경 삼아 바깥을 내려다 보던 세진의 귀에 팍 꽂히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야! 전학생 옴! 근데 동갑은 아니고… 연상임. 짱이지 않냐? 예쁘다는데.”


그 말 하나가 삽시간에 붕뜬 소음을 만들어냈다. 전학생? 연상? 예쁘다고? 이 시기에? 웅성웅성, 알 수 없는 말들이 하나가 되기 시작하자 세진은 어수선하게 떠들며 교실을 나가는 반 친구들의 뒤꽁무늬를 시선으로 쫓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따스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 때문이었다. 슬며시 느껴지는 봄 내음도 좋았고, 시린 코끝도 좋았으며, 고개를 살짝 내밀면 슬쩍슬쩍 얼굴을 보여주는 개망초꽃도 보였다. 예쁘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개망초꽃들이 우수수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이따금 홀린 것처럼 개망초꽃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런 질문들이 들어오곤 했다. 넌 뭘 그렇게 봐? 그 말에 저기, 저 꽃. 하고 답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면 나는 저 꽃은 흔해서 싫던데, 하고 덧붙이거나 그냥 풀꽃 아냐? 하는 반응들이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세진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만을 내놓았다. 저 꽃들이 듣기에 딱히 좋은 말들은 아니었음에. 흔하디 흔한 꽃이라도 본인의 눈에는 예뻐 보이는 엄연한 꽃이었다. 고개를 다시금 내밀어 정문 밖 들판을 쳐다보니 밀려오는 바람에 힘없이 쓰러지는 꽃들이 애처롭게 눈에 들어왔다. 세진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들판으로 가기 위해 교실을 나섰다. 문을 나설 때까지도, 여전한 봄 내음이 세진의 발걸음을 더더욱 재촉했다.


***



“누난 이름이 뭐예요?”

“어? 어... 슬비야. 유, 슬비.”


우와, 누나는 어떻게 이름도 예뻐요? 장난스레 내뱉은 말에 슬비가 입꼬리를 올려 배시시 웃어 보였다. 세진이 일 층에 발을 딛자마자 본 사람. 개망초꽃을 닮은 사람이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전학생.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는 짧고 짙었으며, 눈동자는 한없이 깊고 반짝거렸다. 하얀 하복과 잘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세진은 홀린 듯이 슬비에게 말을 걸었다. 퍽 당황스러워 보였던 슬비의 얼굴 때문인지, 보러 가던 개망초꽃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뭐 잃어버리셨어요? 하는 어색한 말이 그 입에서 술술 삐져나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슬비는 그 어색한 말에 세진을 피하거나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저 멋쩍게 웃으며 품에 있던 음악책을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여기 음악실이 조금 구석에 있어서요. 잘 기억해 두세요. 세진의 당부 덕인지, 슬비는 조금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진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을 빵 터트렸다. 영문을 모른 채 큰 웃음을 선물 받은 슬비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세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얼마 안 가, 조금 그친 세진의 웃음을 비집고 들어가 질문을 후다닥 놓았다. 왜 웃냐는 말에는 그저, 그냥? 같은 가벼운 대답만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또다시 동그래진 슬비의 눈을 마주보고는 세진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비장할 일인가 싶었어요. 그 말에 슬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야, 장난치지 마! 둘의 사이에 오묘한 봄 내음이 돌았다.


음악실은 얼마 안 가 모습을 나타냈고, 슬비는 세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음악실의 크고 거대한 문을 열고 안쪽으로 몸을 숨길 때까지 슬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세진이었다. 어딘가, 마음 속 거대하고 차가운 얼음이 자리잡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 느껴지지 않았던 봄 내음이 한 번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오래 보고 싶다. 이상한 생각이 드는 세진이었다. 슬비와 헤어진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큰 문만 한참을 더 쳐다보던 세진이, 막바지 종소리를 듣고 빨개진 코끝과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왔냐는 물음에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수업 시간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교실 불을 끌 때까지. 익숙한 목소리가, 세진이는 집에 안 가니? 하고 물어왔을 때야 퍼뜩 든 정신이었다. 온종일 한 것도 없이, 하루가 끝나버렸다. 당황한 세진이 급히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오니,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세진, 본인만 모르는 시간의 주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되는 세진이었다. 발을 움직여, 서둘러 슬비에게로 가는 거리를 차차 좁혀갔다. 계단 두 칸을 두고 손을 뻗는 시늉을 하니 뒤를 돌아보는 슬비가 그곳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얼마 안 가 슬비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흘러오던 봄 내음이 멈췄다. 서로를 사이에 둔 계단 두 칸에 꽃이 만개하였다.


“세진이 너는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나야, 서류 처리 도와드리는 것 때문이긴 한데….”

“오늘 특히 늦게 나오고 싶었어요. 이상하다 싶었는데, 누나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그게 뭐야. 슬비의 가벼운 음성이 하늘 위로 톡 튀었다. 서서히 지는 노을이 발치에 닿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여나 슬비에게 들릴까, 급히 시선을 돌려 들판을 가리키는 세진이었다. 바보처럼 말도 더듬었지만, 지금의 세진에게는 그런 요소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지 않았다. 그저, 슬비의 눈을 자기에게서 돌리고 싶은 사랑에 빠진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세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슬비가 어, 개망초꽃이네? 하며 익숙하다는 듯 들판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바람에 쓸려가는 꽃잎들을 차근차근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세진이 홀린 듯 개망초꽃을 꺾어 슬비의 귀 옆에 꽂아주었다. 그냥. 그냥, 이런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러고 싶었기에. 이성보다는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세진의 손길을 빤히 보던 슬비가, 본인의 귀에 담긴 꽃을 손으로 받치며 물었다. 세진이 너, 은근 문학 소년이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세진이었다. 하루종일 생각한 개망초꽃같은 사람이 눈 앞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봄 내음이, 다시 한 번 오묘하게 퍼지는 시간이었다. 누난 정말… 개망초꽃을 닮았네요. 세진이 중얼거렸다. 알아듣지 못한 슬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순식간에 개망초꽃들이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슬비의 귀에 꽂혀 있던 꽃이 훅 날아가, 수없이 만개한 꽃들 사이로 얼굴을 감췄다. 빨개진 세진의 귀를 감춰 주기 위한 꽃의 배려였다. 개망초꽃만이 아는 비밀이, 하나 생긴 저녁이었다. 영원히 그 꽃만 아는, 봄 내음을 타고 들어온 사랑이 비밀이 되는 날이었다.



to. 누나에게

누나, 잘 지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오늘은 꽃이 만개했어요. 집 앞 공터에, 개망초꽃이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이 떠올라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전에 왜 누나한테 말을 걸었냐고 물으셨죠.
저는… 누나가 개망초꽃을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개망초꽃을 흔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다르거든요.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피어요.
애정을 받고 살고, 일상을 받고 살아요. 누나는 꼭 그런 꽃을 닮았어요.
화려하고 가시가 있지만 아름다운 꽃도 있지만, 누나는 그런 꽃과는 달라요.
*제가 있는 동안, 누나가 피어줄 것 같았어요.
한없이 많은 개망초꽃이 시들어갈 때쯤이면, 늘 누나가 생각났어요.
꽃이 시든 것인데, 꼭 누나가 시들어버린 것만 같았어요.

편지를 몇 번이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어요.
누나는 개망초꽃을 닮았어요. 저는 그래서 누나가 좋았어요.
그래서 말을 걸었고, 그래서 누나가 떠난 자리를 코끝이 빨개질 때까지 보고 있었어요.
누나를… 사랑했어요. 사랑하고, 사랑할 거고요.
이 편지는 닿지 않겠지만, 사실… 마음은 닿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만 줄일게요.
더 말하면 편지지가 젖을 것 같아서요.
잘 지내요, 누나.

ps. 누나도 개망초꽃을 볼 때 제 생각을 하세요?



개망초꽃 /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 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슬 (@sxilsxul)

DALBOM